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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4 20:34 2009/12/1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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深夜食堂, ost., opening


鈴木常吉: '思ひ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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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3 16:58 2009/12/13 16:58

K pop girl group mash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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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0 13:11 2009/11/1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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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철 수

'7080의 남자' 배철수
'역시 배철수' 소리 대신 '이건 뭐야' 반응 나올까봐 10집 음반 여태껏 못내
25년간 셋방살이 중학교 1학년때 산 교복 고교 졸업 때까지 입어
외모가 지저분해 구창모가 노래 부를 때 같이 무대에 못 선 적도

"그냥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도 바쁩니다"하고, 배철수(56)씨는 방송 스튜디오에서 말했다. 초대손님 석에 앉은 내가 묻는 역할이었다. 좀 지나면 그는 여기서 팝송을 틀고 생방송을 진행할 것이다.

20년간 그는 이 방송 진행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래서 20년간 저녁 약속을 못했다. 규칙적으로 밤 9시에 귀가해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자유롭게 한번 살아보자고 음악을 했는데, 제가 월급쟁이 회사원보다 더 짜인 삶을 살고 있으니, 어떨 때는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이건 록밴드 정신에 위배되는 게 아닙니까?

"정말 위배되죠."

그러면서 그는 MBC 라디오의 '음악캠프' 진행을 7000회 넘겼고, KBS '콘서트7080'을 5년째 진행하는 중이다.

―젊은 시절의 낭만이 결국 생업(生業)에 굴복한 것입니까?

"그건 좀 다릅니다. 5, 6년 됐을 때쯤 '이걸 계속 해야 하나. 더 잘할 수 있고 자유로운 게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잘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남의 노래를 소개하는 입장이 됐는데, 가끔 내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욕망이 괴롭히지 않나요?

"제 프로에는 세계 최고의 연주자와 가수들의 음악이 나갑니다. 검증된 히트곡이 아니면 이역만리에서 이곳까지 못 오죠. 그런 음악을 계속 듣고 소개하고 있으면, 저와는 점점 더 거리가 느껴지죠. '내가 음악을 그만두길 잘했구나'라고. 저는 성격이 소심해서 그런지, 제 자신이 더 높은 대우를 받거나 위로 올라가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올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몰래 가명(假名)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들 법한데.

"하하하, 그 생각을 한번 해보기는 했죠. '음반을 만들어서 다른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안 알리고 발표하면 어떨까'라고. 구창모씨를 만나면 '송골매 앨범이 9집까지 나오고 끝났다. 마지막 10집을 내고 멋있게 손을 털면 어떻겠냐' '좋은 생각'이라고 서로 얘기는 합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그 친구도 사업한다고 바쁘고, 음악을 하려면 모든 걸 바쳐야 하거든요.

지금 음악하는 후배들이 '선배 음악을 듣고 감명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음악하면 '역시 배철수'라는 소릴 들어야지, '이건 뭐야' 들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부담도 있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러운 음반을 만들 수 없거든요."

―현재 국내 최고의 가수는 이효리이겠죠? 아니면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소녀시대, 원더걸스인가요?

슬쩍 찔렀는데 금방 반응이 왔다. "그건 절대 동의 못하죠"라고.

"이효리가 뛰어난 엔터테이너라는 걸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효리가 심수봉씨보다 노래를 잘합니까. 이효리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릴 수 있나요? 젊은 친구들한테 '너희들 노래는 7080 노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춤이나 추는 노래지 그게 무슨 음악이냐. 우리 시대 음악을 한번 들어봐라'고 합니다. 노래방에 가서 젊은 애들한테 잘 보이려고 괜히 혀도 안 돌아가는 그런 노래를 따라 부르지 말고, 자녀들 앞에서 '우리는 너희보다 좋은 음악, 수준 높은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며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배철수씨는 “성격이 소심한지 나 자신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으면 불안하다”고 말했다. MBC 라디오 스튜디오에서./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세월은 전진했는데, 지금보다 그때 노래가 더 좋다면 되겠습니까?

"요즘 우리 노래는 메시지는 없고 감각만 발달했어요. 편곡이나 포장만 잘 돼 있죠. 지금 활동하는 가수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봅니다. 조용필 송창식 김민기, 서태지까지, 어느 누구도 이 사람들을 뛰어넘기 어려울 겁니다. 팝음악의 전성기는 60, 70년대로 비틀스 이후 수많은 록밴드와 가수들이 나왔지만 비틀스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클래식에도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지요."

―개인 취향으로 국내 가수 중 누구를 제일로 칩니까?

"멜로디와 가사의 아름다움, 히트곡의 수에서도 송창식 선배가 최고라고 봅니다. 내가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 괜히 얘기했는데…. 최백호 선배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심수봉씨도 좋고. 작곡가로서는 신중현 선생님이 제일인데, 노래는 잘 못하지만(웃음)."

―'콘서트 7080'에는 방송 무대를 잃은 그때의 가수들이 서로 다투어 서려고 하지요?

"자주 나오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지만, 종교적 신념이나 자기가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아예 안 나오려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출연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고 싶어요.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수식어를 붙여서 빛나게 해줍니다. '지금 소녀시대가 있지만, 진미령씨는 그때 소녀시대보다 더 인기가 있었고 더 예뻤다. 아직도 소녀 같다. 외모가 꼭 소녀 같진 않아도 마음은 소녀 같다'는 식이죠. 출연자들보다 방청석 경쟁률이 더 셉니다. 매주 꽉꽉 채우는 것을 보면 우리 세대가 문화적으로 너무 목말라 있다는 생각이 들죠."

―진행을 맡으면서 세월에 의해 변한 출연자의 모습에 놀란 적이 있습니까?

"윤항기 선배 같은 분은 과거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것 같아요. 너무 마르고 강퍅한 인상이었는데 나이 들어 온화한 얼굴이 됐어요. 꽃미남이고 멋있었는데 이젠 머리도 벗어진 중년이 된 분도 있어요. 연민의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 나이를 실감하죠. 저도 내일모레 60이 돼가니…."

―젊었을 때보다 나이를 먹을수록 얼굴이 훨씬 좋아진 것 같다는 말을 안 듣습니까?

"많이 듣죠. 어려서부터 제가 워낙 노안(老顔)이라, 20대부터 40대로 보였다고 해요. 젊은 시절 산발 머리에 괴상하게 하고 다녔으니까. 그때보다 저는 상대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변한 거죠. 당시 방송 무대에 청바지 입고 올라간 게 우리 밴드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록밴드도 나비넥타이에 양복을 입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출연을 안 시켜줬으니까요."

―방송사에서 허락 안 해주던 것을 왜 송골매에게만 허락해줬죠?

"글쎄, 우리 인기가 대단했거든요. 또 우리 팀에는 구창모라는 방송 적합한 인물도 있었잖아요. '모두 다 사랑하리'가 1위를 했을 때, 담당 PD가 조용히 와서는 '구창모가 노래를 부르니까 넌 안 나오면 안 되느냐'고 해요. 저 대신 기타를 칠 다른 멤버도 있었고. 저는 근처 당구장에서 당구 치면서 혼자서 TV로 그 프로를 본 적도 있어요. 순전히 외모 때문이었죠."

―대중적으로 더 인기가 있었던 보컬 구창모씨에 대해 시샘이 좀 있었지요?

"전혀 없었어요. 전 '송골매'라는 회사의 오너로서 유능한 CEO를 영입했다고 생각한 거죠. 매니저 없이 제가 그 팀을 다 이끌었으니까요. 밴드 리더이면서, 멤버, 매니저, 음반 프로듀서이기도 했지요. 어쩌면 구창모씨로서는 팀에서 겉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어요. 그때 사이가 안 좋아 원수처럼 헤어졌다면 이렇게 만날 수가 없죠."

1980년대를 풍미한 록밴드 ‘송골매’. 왼쪽 두번째가 배철수, 세번째가 구창모다.
송골매는 1979년 '세상만사'라는 앨범을 내면서 인기 있는 록그룹으로 떠올랐다. 그 뒤 구창모가 보컬로 합류해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처음 본 순간' '산꼭대기 올라가' '빗물' 등 히트곡을 날리며 9집 앨범까지 냈다.

―송골매 그룹이 해체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밴드 생활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음반이 그렇게 팔려도 로열티는 한푼도 없고 회사로부터 전속금을 받는 게 끝이었어요. 방송출연료도 악기를 빌려 운반해가면 운반비 정도밖에 안 됐어요. 방송을 할수록 점점 손해죠. 나이트클럽에서 밤새워 연주해 팀을 꾸려 가는 운영비를 벌었어요. 10년 동안 현충일 하루 쉬고 364일 밤새워 연주했다고 보면 됩니다. 나중에는 음악하는 게 너무 싫고 힘들었어요. 구창모씨도 그게 싫었을 거예요. 솔로가수로 활동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밤새워 고생을 안 해도 되고…."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로 인기상을 받은 1978년 해변가요제에 나갈 때는 주최측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오라고 해서 깎았다고 들었는데, 그래 콧수염은 언제부터 길렀습니까?

"글쎄, 서른 살쯤에 길렀을 겁니다. 그게 '록 스피릿'(정신)이라고 생각했죠. 젊은 치기도 있었으나, 정돈되는 것은 기성세대에 편입되는 걸로 여겼죠. 상식과 늘 다르게 생각하려고 했어요. 버스를 타면 중간바닥에 책을 놓고 앉아서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록정신에는 술이 빠질 수 없는데, 술은 잘 못 마신다고 들었는데.

"대학에 입학해 막걸리를 사발로 마셨는데, 6개월간 계속 마시고는 엎어졌어요. 제게는 유전적으로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는 것 같아요. 군대 이후로 술을 안 마셨습니다. 대신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놓고 두세 시간씩 떠드는 걸 더 좋아해요. 그러니 이런 방송 DJ가 체질적으로 맞는 겁니다. 그동안 하루도 방송을 안 빼먹은 걸 보면 내가 답답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만요."

―20년간 저녁 약속이 없었다는데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나요?

"대신 점심 약속을 합니다. 정치인처럼 조찬 약속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이지요. 그런데 정치인은 왜 조찬 약속을 합니까? 그렇게 바쁩니까?"

그렇다고 하자, "그분들도 저처럼 바쁘군요.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하고 답변했다.

"제가 딴따라라 그런지, 정치 뉴스가 신문에 너무 많아요. 선진국 학교에는 체육시간이 많고 악기를 하나씩 다루고 그림을 그리도록 합니다. 실제 우리가 살아보면 삶의 즐거움은 국영수(國英數)가 아니라 이런 문화적인 데서 오는 게 아닌가요."

―젊은 날 무슨 고민을 가장 많이 했습니까?

"일곱살 되던 해 선친께서 사업에 실패해, 25년간 단칸방에서 셋방살이를 했어요. 몇 푼 안되는 중학교 등록금을 못 내고, 중학교 1학년 때 입은 교복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입었어요. 앞뒤로 기워 옷감이 아니라 누더기였지요. '난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겠다'며 고등학교 진학도 안 하려고 했어요. 날마다 죽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사회에 나가 빨리 돈 벌어 살아보자, 내 집에서 한번 누워보자 하는 원초적인 바람뿐이었지요. 항공대에 들어간 것도 국립이라서 학비가 쌌기 때문이었지요."

―그런 분이 공부는 않고 '잘못된' 길로 휩쓸려갔군요.

"대학에서 아마추어 밴드에 들어간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악기로 협주를 할 때 화음이 맞춰져 나오는 그 기분이란, 연주를 안 해본 사람은 이해가 안 될 거예요. 록 음악을 따라 하다 보니 그 사상에도 빠져들게 됐어요. 자유, 사랑, 평화…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다 있었던 거죠. 운명적이었죠."

―그래서 그때 밥벌이 취업도 안 한 겁니까?

"대학 졸업 무렵 교수님으로부터 항공사 추천서까지 받아놓고 일주일간 고민했어요. 그때 두살 아래 동생이 같은 해에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이 된 거예요. '네가 집안만 책임진다면 난 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하니, 동생이 흔쾌히 승낙했어요. 동생이 없었다면 취직했을 거예요."

생방송 시작 15분을 남겨두고,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요즘에는 가끔 제 삶이 너무 행복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사회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많을 텐데…. 나는 초년 고생이 심해서 이제 편하게 산다고 농담 삼아 말하죠."


입력 : 2009.06.22 03:08 / 수정 : 2009.06.22 09:37

[원문기사]

Posted by yellowsubmarine

2009/06/22 10:27 2009/06/2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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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감정에 따라 시야가 넓어지거나 좁아진다는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아담 앤더슨 교수 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즐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진 또는 우울한 분위기의 사진, 그리고 감정적으로 중립적인 사진을 보여주면서 뇌 움직임을 관찰하고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좋은 분위기의 사진을 봤을 때는 사진 속 얼굴뿐만 아니라 주변 배경까지 기억하는 비율이 높았다. 뇌 영상 촬영 결과도 좋은 감정일 때 시각 담당 뇌 부위가 더 활성화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우울한 분위기의 사진에 대해서는 참가자들이 중심부만 보고 주변부는 잘 보지 않는 ‘터널시각’ 현상을 보였다. 뇌 시각 담당 부위도 덜 활성화됐다.

앤더슨 교수는 이런 결과에 대해 “좋은 감정일 때는 말 그대로 세상을 보는 창이 더 넓어진다”며 “그러나 부정적 감정일 때는 위험한 기계를 다룰 때처럼 심각한 사안에만 집중하고 주변 상황은 보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이 연구 결과는 ‘신경과학 저널(Journal of Neuroscience)’ 최신호에 발표됐으며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온라인 판 등이 4일 보도했다.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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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0 16:38 2009/06/1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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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사소한 일은 중요하지 않은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의외로 성공의 씨앗은 그 사소함 속에 숨겨져 있다. 작은 실수나 주위의 작은 사물을 살펴볼 때 말이다. 사소한 것에 집중할 때 우리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한 단계 도약하는 전환점을 찾을 수 있다. - 사소한 것이 기발한 아이디어의 출발점 허버트 하인리히(Herbert W. Heinrich)는 1920년대 미국 보험여행사의 직원이었는데, 수많은 통계를 다루다가 하나의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형사고 한 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와 관련 있는 소형사고가 29회 발생하고, 소형사고 전에는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사소한 증상들이 300번 발생한다는 통계적 법칙을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1 : 29 : 300 법칙은 그후 '하인리히 법칙'으로 정립되었다. 하인리히 법칙은 사소한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준다. 작은 실수가 조직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고, 사소하고 엉뚱한 생각이 조직을 발전시키는 아이디어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 4인조 브릿팝 밴드 트래비스(Travis)는 2008년 인천 송도에서 열린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나쁜 곡을 많이 써야 좋은 곡이 나옵니다. 작은 고기를 많이 잡다 보면 마침내 고래를 잡게 되죠"라고 말했다. 실패를 두려워 말고 작은 일에 지치지 않고 집중하면 큰 성과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 운전 중 뒤를 볼 수 없었던 시절, 최초의 백미러 우리는 자동차를 운전할 때 백미러(사실 백미러의 정확한 영어 표현은 리어 뷰 미러(rear view mirror이다)를 자주 본다. 만약 자동차에 백미러가 처음 자동차에 장착되었던 것은 1911년이었다. 미국의 한 자동차 회사 기술부장이었던 레이 하루(Ray Harroun)은 자신이 직접 설계해 만든 레이싱카를 몰고 직접 레이스에 참가해 몇 번의 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사고로 인해 레이스를 단념하려 할 때, 800Km 트랙을 달리는 '제 1회 인디 500 레이스'가 거액 1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고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이 하룬은 이 레이스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레이싱카는 차 뒷자리에 정비사가 타서 다른 차의 상황을 알려 주어야만 했다. 레이 하룬은 차 속도를 올리기 위해 무게 절감 차원에서 정비사를 태우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1인승 경주차를 만들었다. 하지만 백미러 역할을 해주는 기능이 차에 있어야만 햇다. 고민하던 중 그는 집에서 아내가 화장을 할 때 손거울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세로 8cm, 가로 20cm 크기의 네모난 거울을 운전대 앞 가운데에 설치하여 뒤에서 추격하는 다른 경주차를 정확히 모니터 할 수 있었다. 이 백미러의 도움으로 레이 하룬은 제 1회 인디 500 레이스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사소한 사물을 보는 관찰력이 바로 백미러를 탄생시킨 것이다. - 곤봉을 통해 탄생한 탄산수 병 남성 셔츠 중 다소 소매가 긴 샴브레이(Chambray) 셔츠가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소매가 긴 셔츠는 불편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모터사이클을 즐겨 타는 사람이라면 샴브레이 셔츠를 원할 것이다. 셔츠를 입고 오토바이를 운전할 때는 팡르 앞으로 쭉 뻗기 때문에 소매가 껑충 올라와 소매가 약간 긴 셔츠가 알맞다. 탁월한 디자이너는 이렇게 다른 사람이 신경쓰지 않는 사소한 마케팅 포인트를 찾아낸다. 탄산수 브랜드로 유명한 페리에는 병 모양이 특이한다. 100년 전 이 병을 처음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평소 곤봉을 가지고 신체단련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손에 있는 곤봉의 모양이 상당히 독특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곤봉과 비슷한 모양의 병을 만들었고, 이것이 유명한 페리에 병 디자인이 되었다. -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기는 용기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멋진 아이디어의 출발이 될 수 있다. 좋은 아이디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먼지처럼 흩어져 있다. 오로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의 눈에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발견한 아이디어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놀라운 혁신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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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5 11:37 2009/04/2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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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1> 돌상 앞의 한국인 ⑤ [중앙일보]
돌잡이는 꿈잡이

오랜만에 돌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색동옷과 복건을 쓴 돌잡이를 보면서 처음으로 거기 의젓하게 앉아 있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았다. 눈물이 흔해진 나이라 그런지 경사스러운 날에 하마터면 눈물을 보일 뻔했다. 색 바랜 사진 한 장. 그나마 전쟁으로 불타버린 내 돌 사진이 생각나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장례식에 가도 곡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혼식장에 가도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세상인데 돌잡이만은 옛날 모습처럼 돌상 앞에 앉아 있다. 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내려와 앉은 것 같은 돌상차림이 아닌가.

그래 나도 돌상 앞에 저렇게 앉아 있었겠지. 아주 작고 반짝이는 그 많은 것들, 이름은 몰랐지만 분명 그것은 붓이고 책이고 무지개 같은 활이었을 거야. 무한대의 기호 모양을 한 것은 장수를 한다는 무명 실타래고 진주알같이 쌓여 있는 것은 만석꾼이 되라는 흰쌀이었을 것이다. “얼른 잡아! 저게 다 너의 꿈인 거야. 좋은 걸 골라 잡기만 하면 돼.” 누군가가 속삭인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고 현실 속에서 내 기억을 일깨워 주신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다. “네가 돌상에서 맨 먼저 잡은 건 붓이었단다. 그리고 낡고 헤어진 천자문 책을 집으려고 했지.” 그때의 말을 나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흡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미소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부귀영화의 쌀과 돈, 권력의 활을 잡지 않고 붓 한 자루 잡았던 나를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신 어머니, 남의 나라처럼 그냥 ‘퍼스트 버스데이’라고 부르지 않고 유별난 돌잡이 풍습을 만들어 준 나의 조국, 그런 어머니의 아들과 그런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돌날 붓을 잡은 나는 정말 평생을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왔고 칭기즈칸도 아인슈타인도 없는 땅에 태어났으면서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지금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

잠시 흐려졌던 눈이 맑아지자 돌상 위에 놓인 낯선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건 컴퓨터 마우스 아닌가.” “예 맞아요. 빌 게이츠가 되라고요.” 돌잡이 아빠는 IT 벤처회사의 간부사원이었다.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은 그는 변명을 하듯 말을 이었다.

“요즘 마우스는 명함도 못 내지요. 박찬호가 뜨면 야구공, 박세리가 이길 땐 골프공이 오르지요. 뭐 사라 장이 한국에 와서 연주를 하면 장난감 바이올린까지 등장한답니다. 그런데 요새는 스케이트래요. 유나 킴, 아시잖아요. 김연아말이에요.”

“어차피 책을 잡아도 판검사 되라고 법전일 테고 CEO 되라고 경영책일 텐데 무엇이면 어떠냐. 나처럼 붓을 잡지 않아도 세계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 되거라.” 폰 카메라 같은 것으로 누군가 백 년 전부터 돌상을 찍었더라면 아마 한국인의 다양한 꿈 사전이, 시대를 읽는 욕망의 역사책이 생겨났을 것이다. 어느 화가가 말한 것처럼 한국의 밥상을 부감촬영하면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밥상의 테두리는 액자가 되고 오방색 음식 그릇들은 추상화가 된다. 더구나 돌상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꿈을 담은 물건들이니 우리 미래를 검색하는 데이터 베이스의 창처럼 눈부실 거다.

예나 지금이나 돌상 앞에 앉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래의 비전을 잡는 한국인의 모습, 그 시작 속에 우리 문화를 읽는 암호가 숨어 있다.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돌잡이 풍속과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첫째는 상(床)문화다. 한국인의 일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돌상(床)에서 제상까지’다. 그 사이에 초례청, 결혼상이 있고 환갑상이 있다. 그런데 일본은 상이 아니라 다다미방에 돌잔치의 물건을 진열한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돌상에 오를 수 없는 칼(사무라이의 칼잡이 문화)이나 주판(상인들 문화) 같은 것들이다.

둘째는 앉는 문화다. 상 앞에서는 서도 안 되고 누워도 안 된다. 한국의 좌식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앉아서 받는 돌상이다. 일본의 돌잡이들은 평생 먹을 양식을 상징하는 떡(잇쇼모찌)을 짊어지고 다다미 위의 돌차림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아이가 걸어가는 쪽 물건으로 미래를 점친다.

셋째는 잡는 문화다. 돌잡이는 꿈잡이다. 한국인은 꿈을 꾸지 않고 손으로 잡는다. “잼잼”과 “곤지곤지”의 애들 놀이에서 쇠젓가락으로 콩알을 집는 손기술까지 모두가 돌잡이의 ‘잡는 문화’로 상징된다. 같은 젓가락 문화권이라고 해도 일본에는 돌잡이의 개념이 없다. 걷지 못하는 아이들은 돌떡(잇쇼모찌)을 발로 밟게 한다.

이어령

Posted by yellowsubmarine

2009/04/20 10:03 2009/04/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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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7> 돌상 앞의 한국인 ① [중앙일보]
나를 지켜준 시간의 네 기둥

인터넷 블로거 뉴스에 아사다 마오는 그 사주(四柱) 때문에 김연아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글이 올라와 있다. 두 선수는 모두 경오(庚午)년 백말띠이고 달수는 갑신(甲申)과 을유(乙酉)이다. 태어난 날은 계유(癸酉)와 계사(癸巳)인데 20일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계(癸)의 일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연아는 갑(甲)목을 손과 발로 쓰고 마오는 을(乙)목을 손과 발로 쓴다는 거다. 더 이상 사주풀이를 들으려 하지 말자. 김연아가 이긴 것은 운을 타고 나서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으니 말이다.

궁금한 것은 그 블로그 뉴스가 베스트에 뽑히고 클릭 수가 만만찮다는 데 있다. 하기야 좋다는 사주 날짜 받아놓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는 세상이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원래 사주팔자란 태어난 해(年) 달(月) 날(日) 시(時)를 ‘네 기둥’(四柱)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두 자로 된 간지명(干支名) 여덟 글자(八字)로 나타낸 말일 뿐이다. 그래서 점복과 관계없이 한 개인의 차이성을 나타내는 ID라고 생각하면 된다.

유럽에서는 중세 때부터 이미 생년월일을 개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왔다. 이름과 주소는 바뀌어도 생년월일은 일생 동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학자 필리프 아리에스는 언젠가는 생년월일 숫자를 시민 전체가 등록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기뻐해야 할지 서러워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예언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한국이다. 사주팔자를 시(時)만 빼고 숫자로 고치면 우리가 무덤까지 갖고 갈 주민등록증 번호의 앞자리 여섯 숫자가 생긴다. ‘사주팔자’가 ‘삼주육자’로 바뀐 셈이다.

사주의 여덟 글자가 한국인에게 각별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은 그만큼 운명론자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이름도 남이 지어준 것이고 태어난 장소도 이사를 가면 그만이지만,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사주 날짜만은 누가 뭐래도 자기만의 것이다.

그런데 그 정체성마저 호적부에 오르는 순간 위태로워진다. 왕의 시간, 황제의 시간, 국가의 시간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연호(年號)라는 것이요, 기원(紀元)이라는 특수 문자다. 실제로 내 생일은 음력과 양력 그리고 호적에 등재된 것으로 지리멸렬되어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출생 당시 호적에는 ‘소화(昭和) 8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해방된 뒤에는 단기, 근대화 이후에는 서기로 표기 방식이 달라진다. 아마 북한 땅이었다면 내 출생일은 주체 23년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역사의 시간, 카이저들의 시간이라는 게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깃발의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은 시 ‘출생기’에서 “융희(隆熙) 2년, 나를 잉태하신 어머니”라고 썼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한 사람은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의 연호로, 또 한 사람은 일본제국의 ‘천황’의 연호를 탯줄처럼 감고 태어난 것이다. 작가 이병주는 다섯 개의 이름을 갖고 살았던 한국 젊은이의 비극을 소설화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융희, 소화, 단기, 서기로 그 명칭이 바뀌어 간 단절과 혼란의 역사라 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시간을 개인 사주의 간지로 바꾸면 사정은 달라진다. 융희 2년은 정미생(丁未生)이 되고 소화 8년생은 계유(癸酉)생으로 변한다.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하여 지붕에 박넌출(넝쿨)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에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의 ‘출생기’의 한 시구절 같은 “그래도”의 시간, “천년의 다채한 시간” 내 생명과 자연과 우주의 시간이 열린다. 아무리 낡고 황당한 주역이나 당사주책(唐四柱冊)이라도 신이라고 일컫던 ‘천황폐하’보다 내 띠인 닭이 먼저다. 아니다. 거기에는 카이저의 절대 권력도 틈입할 수 없는 나의 시간, 하늘의 시간이다. 아무리 소화 8년 황국신민으로 포장하려고 해도 나는 태양보다 먼저 어둠 속에 빛을 토하는 닭띠 계유생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 경오년생 김연아가 국적이 다른 아사다 마오와 은반 위에서 머리칼을 나부끼며 백마처럼 달려오고 있는 시간, 둥글게 둥글게 순환하는 띠의 시간, 영원히 지속하는 시간 그 고리 위의 네 기둥이 한국인들을 지켜왔다.

이어령

Posted by yellowsubmarine

2009/04/20 09:55 2009/04/2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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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dplay - Life in Technicolor

Posted by yellowsubmarine

2009/04/19 23:45 2009/04/19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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