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원문 : 민기자 닷컴]
지난 2006년 제1회 WBC 대회 이후에 미국 및 세계 언론의 한국 야구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그전까지는 ‘박찬호를 비롯해 그저 몇몇 선수들이 빅리그에서 뛰는가보다’ 정도였는데 제 1회 WBC에서의 인상적인 4강 진입 후 전반적인 한국 야구에 대한 관심이 확실히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작년 여름 9연승으로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에는 우리 야구를 보는 시각이 또 달라졌고 현지 기자들의 질문도 잦아졌습니다. 특히 ‘도대체 한국은 어떤 스타일의 야구를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게 됐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기자의 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보다는 힘이 있고, 미국 야구보다는 작은 야구에 능한, 양국의 야구 스타일을 믹스한 것으로 보면 된다.’
물론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렇다면 일본보다는 세기가 떨어지고 미국보다는 파워가 약하다는 뜻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야구는 야구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과 일본 야구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또 나름대로 특유의 야구 문화와 민족성 등 고유 색깔이 합쳐진 독특한 야구를 발전시켜왔음은 분명합니다.
한국 야구와 프로리그의 평균적인 수준을 따지면 아직은 분명히 미국이나 일본에 뒤질지 모르지만 정예 멤버들을 뽑아놓으면 그 어떤 팀도 꺾을 수 있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국제대회에서 수차례 그것을 입증했고, 이번 WBC에서도 1라운드 순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꺾고 A조 1위로 8강에 오른 후 2라운드 첫 경기에서 멕시코를 완파하는 등 실력을 다시 입증하고 있습니다.
현지 방송을 들어봐도 달라진 분위기를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1회 대회 때 한국팀이 승리하면 화제가 된 이유는 약 팀이 놀랍다는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경기 전부터 한국은 아주 강한 팀이라는 코멘트가 쏟아지고, 어떤 팀을 꺾어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말들을 캐스터나 해설자들이 먼저 합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은 국제야구대회에서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기피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작전이나 선수 파악, 또는 투타 매치업 면에서 예측도 불허하고 상황에 따른 변화에 아주 능한 야구를 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홈런을 위주로 힘을 앞세운 전통적인 ‘빅 볼(big ball)’의 강공스타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번트와 작전으로 점수를 쥐어짜는 ‘스몰 볼(small ball)’도 아닙니다. 일본 언론은 한국 감독이 번트를 대지 않아서 놀라고, 또 멕시코 감독은 느닷없는 한국의 번트와 도루 작전에 놀랍니다.
멕시코의 비니 카스티야 감독은 16일 한국전에서 라인업을 대거 수정, 타선의 간판인 아드리안 곤잘레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우타자로 라인업을 짰습니다. 한국 선발이 좌완 류현진이니 당연히 볼 수 있는 작전입니다.
그런데 김인식 감독은 1번 이종욱, 3번 김현수, 7번 이용규 등 좌타자들을 그대로 투입했습니다. 상대 선발이 뉴욕 메츠에서 활약하는 좌안 올리버 페레스였지만 추신수를 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추신수의 컨디션이 최고조였다면 아마 빼지 않을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1회말 이종욱이 8구의 실랑이 끝에 볼넷을 골랐지만 2번 정근우는 번트가 아닌 강공를 펼쳤습니다. 1사 후에 김현수가 안타를 치면서 기회를 잡았지만 김태균의 잘 맞은 공이 유격수 정면으로 가면서 병살이 돼 첫 기회는 무산됐습니다. 이런 작전은 미국식의 큰 야구입니다.
0-2로 뒤진 2회초 이범호의 홈런으로 1점을 쫓아간 후 이용규가 안타를 치고 나가자 도루 작전이 나왔습니다. 하위 타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큰 야구라면 그냥 강공을 택했을지 모르지만 발 빠른 이용규였기에 도루로 상대 수비를 흔들었고, 박기혁 타석에서 결정적인 상대 실책이 나오면서 2-2 동점이 됐습니다.
늘 투수들의 구장이라는 펫코파크에서는 일본 쿠바전이 먼저 열렸고 양 팀은 20안타를 주고받았지만 홈런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루 수비를 잘 막아달라고 투입한 이범호가 이 구장에서 가장 깊숙한 좌중간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뿜어냈습니다.
일본 타선이 12안타를 몰아치면서 쿠바 투수진을 공략했지만 그 중에 장타는 조지마가 친 높이 뜬공을 쿠바 우익수 데스파녜가 햇빛에 공을 놓쳐 머리를 감싸고 내준 2루타 한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이범호에 이어 4회말 김태균이 좌중간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뽑으며 3-2로 역전했습니다. 그리고 5회말에는 대수비로 들어갔던 고영민이 한국 팀 세 번째 홈런을 때리면서 4-2로 달아났습니다.
펫코파크는 투수 친화적 구장이라 멕시코의 타선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았지만 바로 그 구장에서 한국 타선이 홈런 3개를 뽑으리라고는 과연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3개 모두 페레스의 패스트볼을 때린 힘과 힘의 대결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야구의 의외성이고 상대성이긴 하지만 한국이 절대 ‘스몰 볼’만의 팀이 아님은 확실히 증명 했습니다
고영민이 홈런을 친 순간 ESPN 해설자는 ‘한국은 토쿄의 1라운드에서 총 4개의 홈런을 쳤는데 도저히 홈런 치기 어렵다는 이 구장에서 오늘 3개를 때렸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투수진과 수비력이라면 4-2는 아주 큰 리드’라며 한국의 승리를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6회말이 야구는 또 달랐습니다. 선두 이대호가 안타를 치고 나가자 다음 타자 이범호는 번트 자세를 취했습니다. 첫 타석에서 홈런으로 기세를 올린 잘 모르는 타자가 번트 자세를 취하자 3루수 칸투는 바짝 앞으로 다가섰는데 강공으로 돌변한 이범호의 방망이에 맞은 공은 원바운드로 칸투를 머리를 넘어갔습니다. 추가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멕시코 내야진과 코칭스태프는 종잡을 수 없는 한국의 작전에 혼란이 가중됐습니다.
그리고 7회말 이번에는 한국식 발야구가 가세되며 멕시코를 침몰시켰습니다.
전 타석에서 홈런을 친 고영민이 절묘한 3루쪽 기습 번트로 노아웃에 진루하자 김현수는 특유의 선구안과 참을성으로 볼넷을 골랐습니다. 곧이어 1루 주자를 이진영으로 교체한 직후 완전히 상대의 허를 찌르는 더블 스틸로 무사에 주자 2,3루가 됐습니다.
그리고 간판타자 김태균은 좌전 적시타로 발 빠른 두 주자를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6-2, 사실상 승부를 결정짓는 쐐기 안타였습니다.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이택근의 볼넷과 이범호의 이날 세 번째 안타, 이용규의 희생플라이와 박기혁의 안타까지 터지면서 8-2가 됐습니다. 멕시코는 7회에만 4명의 투수가 나왔지만 단타 4개, 볼넷 2개, 도루 2개, 희생플라이 등으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이제 한국은 숙명의 라이벌인 일본과 18일 승자 대결을 벌입니다. 거기서 승리하면 4강이 확정됩니다.
패한 팀은 멕시코-쿠바전 승리 팀과 패자부활전을 벌입니다. 만약 한국이든 일본이든 앞으로 2연패만 하지 않고 1승만 더 거두면 함께 4강에 갑니다. 그렇게 되면 1조 순위 결정전에서 또 한번의 한일전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만약 준결승에서 나란히 승리한다면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이 벌어지는데 그럼 이번 대회에서만 극동의 야구 라이벌은 5번째 만나게 됩니다. 이 시나리오가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높을지는 모르지만 참 희한한 대회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시나리오는 잠시 잊더라도 한국 야구는 이제 세계 야구무대에서 확실한 강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한국 야구는 빠르고 참을성 강하고 선구안은 세계 최고입니다. 수비도 건실한 편이고, 실수를 잘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자멸하는 경기가 거의 없고, 상대 투수들을 괴롭히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또한 중심 타선은 어느 구장에서도 담장을 넘길 힘이 있습니다.
대표팀의 투수력도 세계 수준입니다. 돌아보면 1라운드에서 일본전 대패가 있기는 했지만 나머지 세 경기에서 우리 팀은 대만, 중국, 일본을 모두 영봉으로 돌려세웠습니다. 오늘(16일) 멕시코전도 선발 류현진이 다소 부진, 2점을 주고 내려갔지만 갈수록 놀라운 정현욱을 비롯한 5명의 투수들이 6.1이닝 동안 멕시코 강타선을 4안타 무실점으로 막았습니다. 김광현까지 살아나는 모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은 아주 공격적인 야구를 하고 투지와 승부욕은 어떤 팀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경기를 보기 힘들고 조금 힘이 부쳐도 1,2점차의 승리를 가져오거나, 혹은 상대 팀의 기를 질리게 만들어 대승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앞으로 한국 야구가 연구 대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입니다.
어쩌면 세계의 야구 국가들이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도깨비 팀은 바로 대한민국 야구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yellowsubmarine